김인숙 《Eye to Eye》에 대하여
야마다 소(시가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ye to Eye》에는 백인, 아시아인, 흑인 등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아이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스크린에 투사된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관람자는 처음에 “이곳은 어느 나라일까?”라고 느끼며 당황할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에 머물며 작품을 계속 바라보면, 아이들이 입고 있는 체육복, 배경에 보이는 유도장, 간간이 들려오는 말소리 등을 단서로 이 아이들이 ‘일본에 사는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알아차리게 된다.
화면 속 아이들은 시가현에 위치한 브라질인 학교 ‘산타나 학원(콜레지오 산타나)’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Eye to Eye》에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브라질이 본래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학교에는 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 약 80명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학교가 시가현에 존재하는 것일까.
2022년 기준 시가현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운데 브라질 출신 이주민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1990년 개정된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은 일본계 외국인(3세까지)과 그 배우자에게 취업 자격을 부여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뉴커머’라 불리는 브라질 출신 이주민들이 시가현에도 증가했고, 이들 가운데 다수는 자동차 관련 공장 등이 밀집한 공업단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후 가족을 일본으로 불러들이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이주민들의 정주화도 점차 진행되었다.
한편, 1992년 브라질에서 교직에 종사하던 일본계 브라질인 나카타 켄코(글에서까지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은 망설여져, 이하 ‘켄코 선생님’이라 부르겠다)는 휴가를 이용해 일본을 방문해 약 2년간 체류하게 된다. 어느 계기를 통해 켄코 선생님은 취업을 목적으로 일본에 온 브라질인들이 거주하던 사택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놓인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한 채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과 지역사회, 더 나아가 일본이라는 국가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된 아이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이처럼 재일 외국인 아동의 미취학 문제와 사회적 배제는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오히려 이주민이 증가하고 있는 오늘날의 일본 사회에서, 이는 더욱더 시급하게 다뤄져야 할 인권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켄코 선생님은 한 차례 브라질로 귀국한 뒤 일을 하며 자금을 모았고, 5년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시가현 아이쇼초(愛荘町)에 산타나 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이 학교는 다양한 이유로 일본의 교육 시스템과 연결되지 못한 아이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켄코 선생님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태양처럼 환한 미소에 위로를 받고, 한계를 모르는 추진력에 용기를 얻게 된다.
이처럼 아이들을 둘러싼 어려운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 놓고 보면,《Eye to Eye》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를 지닌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실제로 이 작품은 ‘이주’를 주제로 한 현대미술이며, 그 자체로 일정한 사회 비평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을 사회적 맥락과 분리된 단순한 비디오 포트레이트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다른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Eye to Eye》에서는 정치적 기획이나 도발적인 장치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거의 아무런 설명 없이 화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Eye to Eye》는 사회적 문제 앞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작품도 아니며, 직접적인 지원으로 이어지려는 실천도 아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저널리즘적 성격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김인숙의 접근은 ‘취재’와는 분명히 다르다. 물론 그녀는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작품 속에서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카메라를 든 김인숙의 시선은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을 향해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시선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약 80명의 외국인 아이들로부터.
《Eye to Eye》는 제목 그대로 ‘서로 바라봄’을 주제화한 작품이다. 관람자는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이때 포트레이트가 사진이 아닌 영상이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상이기에 관람자는 아이들의 수줍음이나 긴장, 표정과 몸짓에 나타나는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할 수 있다. 그 자리에 살아서 서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주 작은 움직임들은, 아이들 각자가 지닌 삶의 이야기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들은 흔히 ‘재일 브라질인’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된다. 물론 이러한 범주는 유효한 측면도 있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지원하고자 할 때, 일정한 범주화가 필요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Eye to Eye》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재일 브라질인’이라는 범주가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그들을 하나로 묶어 말한다. 외국인, 불쌍한 아이들, 도움을 받아야 할 아이들……. 악의이든 선의이든, 범주화는 안개처럼 전체를 덮어 개인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김인숙은 이 작품을 통해 그 안개를 걷어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끊임없이 ‘개개인’을 드러낸다.
여기에 더해, 이 작품에서 김인숙의 또 하나의 의도를 추측해보고 싶다. 관람자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동시에, 그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이 과정이 사실상 80명의 아이들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섰던 김인숙의 경험을 관람자가 따라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시선의 상호성’을 구현하는 이 공간 구성야말로(앞서 정치적 기획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Eye to Eye》가 지닌 가장 도전적인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람자는 아이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움츠러들거나, 시선을 피하거나, 혹은 눈을 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산타나 학원의 아이들이 일상 속에서 받아왔을 시선과도 겹쳐진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작품의 관계자로서 이러한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나는 이전 직장이었던 보더리스 아트 뮤지엄 NO-MA에서 근무하던 시절부터 김인숙과 산타나 학원, 양쪽과 교류해왔다. 어느 순간, 이 두 존재를 연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교류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이들과의 아트 워크숍을 통한 교류가 목적이었을 뿐, 작품으로서의 결과물을 상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도쿄도사진미술관의 에비스 영상 페스티벌 커미션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왔고, 그 결과 김인숙은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처음 산타나 학원을 방문한 순간부터 도쿄도사진미술관에 전시되기까지, 나에게도(아마 김인숙에게도) 모든 일은 숨 가쁜 전개였다. 나는 단지 연결 고리 역할을 했을 뿐, 특별히 한 일은 없지만, 여러 우연이 겹친 끝에 이러한 훌륭한 작품의 탄생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김인숙과 함께 산타나 학원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제작 기간 동안 때때로 김인숙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녀의 표현을 지탱하는 핵심을 엿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리서치일까, 치밀한 콘셉트일까, 혹은 인스톨레이션의 설계일까. 물론 이 모든 것들은 그녀의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은 ‘친해지는 것’이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산타나 학원의 아이들을 하나의 ‘범주’로 바라보는 한, 결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김인숙은 아무렇지 않게 그 간극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그녀는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나누고, 함께 웃었다. 그것이 바로 김인숙이라는 아티스트의 손길이며, 《Eye to Eye》는 그렇게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