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Seeing The Ordinary Ordinarily'-Artist, InSook Kim
Shigeo
What do Koreans in
Responses of South-Koreans toward 'Koreans in
However, isn't now the time that South Koreans, Japanese and Koreans in
Obviously, there is the diversity among Koreans in
Fear of the selected, full heart and ...
People, who live in the boundary and who represent the boundary, tend to be biased against the 'suffering' and the 'fear' about existing in the boundary. In the past, from the art even to literature, the representation about a subject matter, 'Koreans in
The cult of the ordinary
The work, "SAIESO_in between" represents the figure that Koreans in
Actually, it is true that 'Sai(the boundary)'exists there: 'between' a generation and a generation and 'between' the
Unchanged thing
Can't we say this? - 'Koreans in
However, at the same time, we need to say it- the 'ordinary' of contemporary Koreans in Japan is possible only by the experience of the 'unordinary' of first and second generation Koreans in Japan. And, these two are also connected through 'Sai(the boundary).
Changeable thing
Identifying the features of South Korean, Japanese and Korean in Japan is almost impossible even to me, a specialist in South Korea. The looks of Koreans in Japan and Japanese are almost similar. The work of InSook Kim demonstrates it again. It is natural that Koreans in Japan have been assimilated into Japanese culture over generations. For example, Japanese immigrants in Brazil might be difficult to have similar features with Brazilians; on the other hand, getting similar between Koreans in Japan and Japanese might be easier because Korea has frequently associated with Japan since old times. And, in the near future, it might be impossible to identify Koreans in Japan and Japanese through the looks. Long time ago, some people in the Korean peninsula immigrated into and settled in Osaka, Yamato, Yamasiro, Dango, Oumi and etc of Japan, and they had been assimilated into Japanese. In fact, we cannot say that their case is identical with that of contemporary Koreans in Japan because the meaning of 'Sai(the boundary)' is different in them and contemporary Koreans in Japan; but this meaning will be naturally changed if one hundred year or five hundred years pass.
In the other perspective, 'ordinarization of Koreans in Japan' also means the beginning of 'being Japanese of Koreans in Japan'. However, nobody knows how they will be transformed.
I think that such change was first caught by the work of InSook Kim. The reason why superficially banal her work attracts me is that she represents just beginning of such 'transformation' quietly using a low voice. Truly, monstrous transformation is begun quietly in the every day and without attracting any attention.
Translation: Heajin Mun
日常を日常として-金仁淑の作品
千葉成夫(美術評論家、中部大学教授)
韓国人にとっての「在日」
「在日」にたいする韓国人の反応は、概して、両極に分れがちである。つまり無関心と極端なまでの関心とに、だ。そして後者の多くは「在日」を社会問題、ないし政治的問題と直結させて強い関心を寄せる。むろん、無関心な人々に無理に関心を抱けとはいえない。また、特定の片寄った関心を寄せる人々に、その視点から離れて事を見てほしいと願うのはむずかしいことなのかもしれない。加えて、韓国のごくごくふつうの人々のなかにある「在日」にたいするイメージ、思い込み、通念、偏見は、依然としてといわなければならないが、「韓国人のくせに日本なんかで金を儲けた奴ら」といったものである。
しかしもうそろそろ、韓国人も日本人も在日自身も、「在日」もふつうの人間であり、ふつうの生活を送ってきているのだという事実から、出発し直すべきではないか。
「在日」はほんとうはもちろん多様である。この多様さは、「在日」の一人一人にとって抱えている問題が多様だ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る。だから一括りにはできないし、一人一人の個人に戻るほかはない。そしてそこまで戻るとき、現れてくるのは「一人の人間」ということなのである。ただ、ひとつだけ「在日」に共通しているのは、金仁淑のこの展覧会と作品のタイトルが物語る「in between」、「あいだ」ということなのだ。韓国人も日本人も、ふつうは、「間」で生きているわけでも、「間」を生きているわけでもない。しかし「在日」は、本人の意志とはかかわりなく、「間」で生き、「間」を生きている。そうであるほかはない。
選ばれて在ることの怖れと恍惚と
「間」を生きる人は、そして表現者は、えてしてそのことの「苦」と「怖れ」の側へと傾きがちである。「在日」もまた、美術から文学まで、これまでの表現の主流はそういうものだったし、そこに優れた作品群を生んできた。「在日」をめぐる社会矛盾がもう解消されたわけでない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が、しかし他方、すでに「在日四世」がたくさん生れてきている時代でもある。この変化に眼を向け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金仁淑は「在日三世」として、「間」を生きることのむしろ「平静」と「喜び」の側をも、ごくふつうのこととして受容し、享受してきた。かつての「在日」がいわば「非日常」だったとするなら、金仁淑にとって「在日」とは「日常」である。彼女の眼と感性はこの「日常」を糧として育まれてきた。そこにはごくふつうに人間をめぐる喜怒哀楽があるが、全体として平静な日常なのだ。そして僕たち人間は、誰だって、平常な日常のなかで生きることを望むのである。
日常礼賛
作品《in between》は、穏やかな日常を生きている「在日」の人々を写し出している。その穏やかさは、モデルとなった人々の顔の表情がなによりもはっきりと物語っている。年老いた一世の女性から、四世をお腹に宿している三世の女性まで。祖母と孫娘から、夫婦とその子供まで。三世代が揃った群像から単独像まで。それぞれが住む家のなかで写真に収まっている。そこに僕たちが感ずるのは、穏やかで豊かな日常ということであり、それを大切にして生きている人々の姿なのである。まずそのこと、「在日」の「日常」とその「穏やかさ」を直接的にとらえている点で、金仁淑の写真作品は優れている。彼女は、自身が「在日」でありながら、「在日」をめぐるいかなる思い込み、先入観、イデオロギーからも自由である。美術家であることが大きいのかもしれない。眼を曇らせることなく世界を見、見たものやことにたいして素直である人を、美術家というのである。
もちろん、そこに「間」ということの現存はまぎれもない。世代と世代の「間」、日本列島と朝鮮半島の「間」。着ている衣服から、部屋そのもの、家具・調度品類、部屋のなかの細かいものにいたるまで、「間」はあらゆるところから顔を覗かせている。そしてこれが金仁淑の主題である。すなわち、彼女によってとらえられた現在の「在日」のありのままの生活の姿は、やはり「間」ということを軸にしている。しかしそれは、すでに「非日常」ではなくて「日常」なのである。それが「日常」として「在日」の生活のなかに沈み込んでいくうちに、その「意味合い」が変ってきているのだ。そしてそれもまた、いやむしろこちらのほうこそ金仁淑の主題だというべきである。
変らぬもの
こんなふうに言いうるのではないか-金仁淑たちの登場によって、はじめて、「在日」が「日常」になったと。そして、だからもう後戻りということはない筈だと。
しかし同時に、こうも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は、在日二世くらいまでの「非日常」体験を経たうえでの「日常」なのだと。そして、この前者と後者もまた、「間」ということを通してつながっていると。
変るもの
韓国人・日本人・在日の顔の見分けについてはセミ・プロの僕でも、三世や四世になると、お手上げだ。もうほとんど日本人と変るところは何もない。金仁淑の作品を見ていて、あらためてそう思う。世代を重ねればその土地に同化していく度合いが深まるのは自然である。まして、例えばブラジルに移住した日本人ならともかく、古来、往き来の頻繁な朝鮮半島と日本列島の間のことなのである。そして、いつか、そう遠くない将来には、少なくとも外見上からは「在日」と日本人の区別は不可能になるだろう。かつて大昔、朝鮮半島の各地から日本列島にやってきて、大和、山城、丹後、近江の地などに住んだ人々は、やがて「日本人」となっていった。彼らと、近代の「在日」とは、同じではない。そして何が違うのかといえば、「間」ということの意味なのだ。しかし、もちろんこの「意味」すらも、100年とか500年といった時間のスケールでみるならば、変っていくだろう。
「在日」の「日常」化は、一方で「日本人化」の始まりを意味する。しかし同時に、他方で、「間」ということの意味の変容をも意味しうる。それがどのような「変容」になるのかは、むろんまだわからない。
僕の考えでは、この「変容」は、金仁淑の作品によってはじめて捉えられている。一見、何気なく見える彼女の作品が僕を惹きつけるのは、この「変容」のまさに始まりのところにいることを、それが静かに、声高にではなく、表現しているからである。ほんとうの大きな変容は日常のなかで、静かに、変容とは判らないいうちにはじまる。■
일상을 일상으로서 -
치바 시게오(일본 미술평론)
한국인에게 '재일교포'란...
'재일교포'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그 것은 '무관심'과 '극단적인 관심'이다. 후자의 경우, 대체로 재일교포를 사회적인 문제, 혹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시키며 강한 관심을 나타내곤 한다. 물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강요할 수는 없으며, 편향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에서 봐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와 더불어, 일반적인 한국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재일교포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와 오해, 편견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같은 나라에서 돈벌이를 해가며 살아가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재일교포 스스로도 그들 역시 보통 사람이며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때이지 않을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재일교포에게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그 다양성이란, 재일교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가 그 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들을 한 데 묶을 수는 없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의 개인에게 집중했을 때 '하나의 인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것은
선택되었다는 두려움과 가슴 벅참과
경계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표현을 하는 사람들은, 경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에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 미술에서 문학에 이르기 까지, '재일교포'라는 소재에 대한 표현 역시 대체로 그러하였고, 그로부터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이미 알고 있듯이, 재일교포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들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이지만, 한편에서는 이미 많은 재일교포 4세들이 태어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재일교포 3세인
일상예찬(日常礼賛)
작품 "사이에서 in between"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재일교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평온함은 모델이 되어 준 사람들의 표정에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인생의 황혼에 서있는 재일교포 1세 여성에서 4세를 뱃속에 품은 3세 여성에 이르기 까지. 증조할머니와 증손자에서 부부와 그들의 아들 딸에 이르기까지. 3대가 함께 한 가족사진에서 홀로 찍은 사진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그들이 생활하는 거실에서 필름에 담아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평온하고 풍요로운 일상이며, 그 일상을 소중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재일교포들의 일상'과 그 '평온함'을 현장에서 포착했다는 점에서
물론, 거기에 '사이(경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세대와 세대의 '사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사이'. 입고 있는 옷부터, 방이라는 공간, 가구 및 세간, 방 안에 놓인 자질구레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사이'는 이 모든 곳에서 그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변하지 않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도 말해야 할 것이다 -- 그것은 재일교포 2세 즈음까지의 '비일상'이라는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상'이라고.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역시 '사이'를 통하여 연결되어있다고.
변하는 것
한국인, 일본인, 재일교포의 생김새를 구분하는 것은 3세대, 4세대로 넘어가면서 나름 한국전문가라고 자부하는 필자조차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재일교포와 일본인의 생김새는 이제 거의 다를 바 없다.
'재일교포의 일상화'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재일교포의 일본인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식의 '변모'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러한 변화가
번역/김은선